[Daum 민기자 칼럼] - 빌려온 자료입니다
1978년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미대학선수권대회에서 그가 남긴 인상은 영원히 기자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야구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본격적으로 싹튼 경기였을지도 모릅니다.
투수치곤 체구도 그다지 크지 않았고 운동선수라고 하기에는 곱상한 얼굴에, 동그란 은색의 존 레넌 안경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거구의 미국 선수들과 맞선 그의 표정은 뭐랄까, 담담하다기 보다는 '니들이 감히 내 상대가 되겠어?'라는 오만함까지 엿보였습니다. 거의 무표정하다가 가끔씩 씩 짓는 미소가 전해주던, 조금은 통쾌감까지 담은 그 전율.
그날 경기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두 가지는 불같은 강속구도, 짜릿한 삼진도 아니었습니다.
너무도 황망하게 우리 곁을 떠나버린 '불꽃 투수' 최동원 |
'아리랑 볼'과 '1루 견제구'
그 두 가지 장면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눈에 선합니다.
1루에 주자가 나가자 그는 견제구를 던졌습니다. 주자를 잡겠다는 의도보다는 그저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과 주자의 리드를 좁힌다는 정도의 평범한 견제구.
그런데 1루 주자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1루로 황급히 돌아갔습니다. 그다지 서두를 타이밍은 아니었지만 기본기에 충실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슬라이딩을 하는 모습을 보더니 특유의 '씩~ 미소'가 잠시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또 견제구와 이어지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 두 번, 세 번, 네 번쯤 그렇게 의미 없는 견제구를 던졌고 그럴 때마다 거구의 1루 주자는 몸을 날리며 베이스에 머리를 던졌습니다. 실은 의미없는 견제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몇 차례 견제구를 하고는 '그 정도면 마음자세가 훌륭해.'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타자에 집중했습니다.
처음엔 상대 선수를 가지고 노는 장난스러움이었지만 이내 상대의 진지함에 존중을 보내는 그런 느낌이랄까. '어, 이 투수가 주는 이 분위기는 뭐지?' 그리고 그는 힘 가득 담은 호쾌한 스윙을 보이던 미국대학 대표 타자를 상대로 '아리랑 볼'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낙차가 엄청나게 크게 떨어지는 초 저속 커브였습니다. 아마 80km 정도의 속도나 나왔을까요. 처음에 멈칫하며 스트라이크를 먹었던 타자는 두 번째는 혼신의 힘으로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허공만 세차게 갈랐습니다. 150km 강속구를 던져도 얻어맞을까 걱정하던 야구팬들은 그의 그 만화 같은 투구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똑같은 아리랑 볼을 몇 번이고 거푸 던져댔습니다.
'저 당돌함과 강심장을 어찌 할까나!' 아리랑 볼을 뿌리며 그가 함께 던진 '영원한 승부사'라는 강인한 느낌은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뇌리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낸 그지만 이 '불꽃 투수'의 명품 중의 명품이라면 1984년 가을의 추억입니다.
그런데 실은 정규 시즌 이미 전설을 한 차례 썼습니다. 팀당 100경기를 치렀던 그 당시 최동원은 절반이 넘는 51경기에 출전했습니다. 20경기 선발에 31경기 구원, 무려 284.2이닝을 던졌고 1132타자를 상대했으며 229개의 안타를 맞고 223개의 삼진을 잡았습니다. 27승 13패에 6세이브, 그리고 평균자책점 2.89, 그해 자이언츠가 50승을 기록했으니까 팀 승수의 54%를 그가 홀로 거뒀습니다. 거기에 6세이브까지 하면 팀 승리의 66%가 그의 몫이었던 셈입니다.
좀 단순 무식하게 산수를 해볼까요.
만약 요즘처럼 133경기를 하는데 당시 최동원의 페이스만큼 던졌다면? 총 68경기 출전에 36승과 8세이브, 그리고 373이닝 투구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만약 메이저리그의 162경기 시즌이라면? 총 83경기 출전에 462이닝을 던지며 44승에 10세이브를 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즘 야구에서 만약 당시 그의 페이스만큼 던진다고 가정하면 이만큼의 정규 시즌을 보낸 셈이 되니 입이 딱 벌어집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의 신화는 한국시리즈에서 묻혀 버립니다.
삼성 라이온스의 막판 두 경기 롯데에 져주기 추문으로 어찌 보면 선악의 대결이라는 구도에다가, 절대 약세인 롯데 자이언츠의 희망이라고는 오직 하나 최동원이 있었다는 것. 그렇게 신화가 만들어질 분위기는 조성이 됐지만 상식적으로 최대한 쓸 수 있는 '최동원 카드'는 3경기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던졌습니다.
1차전 완봉승으로 기선을 제압하더니 3차전 승리에 이어 5차전을 내줬지만 6차전 구원승, 그리고 결국 7차전에 완투승. 경기를 눈으로 봤고 기록으로 다시 확인해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신화를 만들어내고 맙니다. 물론 혹사였고, 상식선을 넘어서는 기용이었지만 그는 팀의 우승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5경기 출전, 4경기 선발, 1완봉 포함 4경기 완투, 총 40이닝 던지며 4승1패에 1.80의 평균자책점- 이것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남긴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승 축하연장으로 올라가면서 쌍코피를 쏟았다고 하지요.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야구팬에게는 그는 어쩜 자존심이고 가장 믿음직한 보루였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스포츠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포스트 시즌만 되면 미국 기자나 야구 관계자들과 각종 기록 이야기를 하면서 늘 그의 기록을 자랑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둔 투수가 있었다'라고. 그러면 대부분 농담하느냐는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그런데 1패도 있었다.'라고 덧붙이면 거의 다 웃음을 터뜨리며 혀를 내두르곤 했습니다. 물론 한편으론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엄청난 기록을 만들어낸 투수가 있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건 국적이나 시대를 넘어선, 경이로움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었습니다.
추석 연휴에 역대 한국시리즈 명승부 프로에서 그의 당당한 모습을 다시 보았습니다. '최동원은 '영원한 승부사'니까 곧 일어나겠지, 그리고 그의 염원인 프로야구 감독을 맡고 다시 불꽃 투수의 화려한 승부사 기질을 보여주겠지.'라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황급히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살아생전에도 그는 이미 추억이고 전설이고 그리움이었습니다. 늘 역동적이고 자신만만하며 승부를 즐기는 그의 마운드에서의 모습은 그 자체가 신화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야구팬이 다시는 얼굴 마주할 수 없는 추억이고 전설이고 그리움이며, 그리고 아쉬움이 돼버렸습니다. 같은 시대에 팬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감사했습니다. 얼마 전에 떠나신 또 다른 전설 장효조님과 함께 하늘나라 야구장에서 신명나게 야구판을 벌이십시오. 늘 기억하고 응원하겠습니다.
동근 : 오래 오래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편히 잠 드소서...
'SCRAP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 나를... " (0) | 2011.10.11 |
---|---|
父情 (0) | 2011.09.16 |
[스크랩] 꽃사진 (0) | 2011.06.13 |
[스크랩] 명이 나물 장아찌 (0) | 2011.04.17 |
[스크랩] [에누리닷컴 체험단] 흔들림 없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다 - MK394-PQ (0) | 2011.04.07 |